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만치케르트 전투]]와 몰락 === 1067년 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론은 또 다시 급변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유목민들의 침공으로 유프테라스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유프라테스 방어선 중심 기지인 멜리티니는 포위당했고, 튀르크 유목민들은 소아시아의 중앙부인 이코니온 평원 일대까지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치세에 경외시 당하던 군인들의 입지가 급격히늘어났다. 다만 이것은 콤니노스 가문을 위시한 파플라고니아 군부 세력이 아닌, 카파도키아 군인들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1068년, 에브도키아는 원로원 상원의 표결로 당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통보받았던 카파도키아 군부의 대표자 격인 [[로마노스 4세]]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협상으로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인정받은 에브도키아가 로마노스 4세와 재혼함으로써 정통성을 보완하고자 했다. [[로마노스 4세]]는 두 차례 원정을 나갔으나 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셀주크 제국]]은 원래 제국의 세력권 아래에 있던 알레포 토후국과 [[마르완 왕조]]를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만들었고, 제국 동방의 외부 방벽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에 처음부터 그를 탐탁치 않아하던 원로원과 에브도키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로마노스 4세는 그의 입지가 위험해지자 대규모 원정을 결심하였다. 그 결과는...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b91983bdc46a23b4099909323c5738af.jpg]] 1071년, 제국은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의 알프 아르슬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군사적 피해는 크진 않았으나 황제 [[로마노스 4세]]가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후 암살되면서 제국의 고질병인 심각한 내분이 벌어졌으며 장군들은 '''내전을 위해 각자가 튀르크인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 대가로 요충지와 요새를 넘겼다.''' 국정의 총괄자인 황제가 사라지자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원로원은 로마노스 4세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미하일 7세]]를 다시 제위에 올렸다. 그런데 얼마안가 로마노스 4세가 석방되어 수도로 오고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고 로마노스 4세를 막기 위해 군대를 소모해야 했다. 1071년 부터 1081년까지의 10년 동안은 그야말로 대혼란의 시대였고, 각지의 군부 유력자들이 난립하여 군벌 시대가 펼쳐졌다. [[미하일 7세]]는 동부 방어선의 구멍이 되어버린 카이사레아 인근의 통행로를 차단하기 위해 1072년과 1074년 소아시아 동부 지역에 아직 남아있는 가용 병력을 총동원하여 원정을 나갔으나 실패했다. 이후 튀르크 유목민들은 아나톨리아 깊숙히까지 들어왔고, 중앙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거의 없었다. 결국 1080년까지 아나톨리아에 있는 거의 모든 제국의 영토가 튀르크인들에게 잠식되었고, 시노페, 트라페준타 등 흑해 연안의 일부 도시들만이 제국령으로 남아있었다. 한편 미하일 7세 정부는 물자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대폭 인상하였고, 이는 1074년의 [[도나우 강|이스트로스 강]] 일대 도시들의 반란을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발칸 반도의 방어선도 무너졌고, 1076년 [[페체네그족]]은 남하하여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약탈했다. 1076년이 되자 유통 경제가 전란으로 마비되면서 곡물 공급에도 애로사항이 닥쳐왔고, 이에 미하일 7세 정부는 1077년에로 공영 식량 창고라는 시설을 도입했다. 모든 식량 판매자들은 이 국영 시장에 식량을 판매하고 수수료를 지불했으며, 구입자들은 시장에서 수수료가 포함된 값으로 식량을 구입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상인들이 끼어들어 가격 장난질을 시작하자 1077년도의 공식 식량 가격이 1075년~ 1076년 대비 거의 50배 수준으로 폭등했다. 1077년에는 아나톨리콘 테마의 절도사인 [[니키포로스 3세|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와 디라키움의 절도사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s-2]]가 반란을 일으켰다. [[미하일 7세]]의 중앙 정부는 처절하게 버텨 수도 인근을 수비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더 이상 튀르크족이나 페체네그족을 막을 힘이 없었다. 1078년 3월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수도 건너편 해안에 도착하여 봉화로 도착을 알리자 곧 시민군은 반란을 일으켰고, 미하일 7세는 결국 제위를 포기하고 수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는 [[니키포로스 3세]]로서 제위에 올랐다. 이로써 후기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들이 만든 정치 체제는 최종적으로 붕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